복사기가 없던 시절에는 문서를 어떻게 복사했을까? 카본지의 역사


 

지금은 문서 한 장을 복사기에 넣으면 몇 초 만에 똑같은 사본을 만들 수 있다. 컴퓨터로 작성한 문서라면 파일 자체를 복제하거나 필요한 만큼 다시 출력하면 된다.

하지만 타자기가 사무실의 중요한 기록도구였던 시대에는 상황이 달랐다. 타자기로 편지 한 장을 완성한 뒤 똑같은 내용을 한 부 더 만들려면 처음부터 다시 타이핑해야 할 수도 있었다.

이런 불편을 줄여준 대표적인 도구가 카본지(carbon paper)였다.

원본 종이와 다른 종이 사이에 얇은 카본지를 끼워놓고 글씨를 쓰거나 타자기의 키를 누르면 압력이 아래쪽 종이까지 전달되면서 같은 내용의 사본이 만들어졌다.

프린터도 복사기도 필요하지 않았다. 글을 작성하는 바로 그 순간에 원본과 사본을 함께 만드는 방식이었다.

카본지는 타자기보다 먼저 등장했다

카본지라고 하면 오래된 사무실의 타자기부터 떠올리기 쉽지만, 그 역사는 실용적인 타자기가 널리 보급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초에는 압력을 이용해 동시에 두 장의 문서를 작성하려는 방법들이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영국의 발명가 랠프 웨지우드(Ralph Wedgwood)다. 그는 1806년 ‘stylographic writer’와 관련된 특허를 받았다.

웨지우드의 방식은 잉크가 묻은 종이와 압력을 이용해 글의 사본을 만드는 아이디어와 연결되어 있었다. 오늘날 사용하는 카본지와 세부적인 형태는 달랐지만, 글을 쓰는 동작과 동시에 복사본을 만든다는 점에서 중요한 초기 사례로 평가된다.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의 펠레그리노 투리(Pellegrino Turri) 역시 복사용 종이와 관련해 언급된다. 투리는 앞서 타자기 편에서도 등장했는데, 시각장애가 있던 카롤리나 판토니 다 피비차노가 글을 쓸 수 있도록 기계식 필기 장치를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카본지의 ‘최초 발명자’를 한 사람으로 단순하게 정리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19세기 초 여러 지역에서 복사용 종이와 기계식 기록 장치가 함께 발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본지는 특정 순간 갑자기 완성된 물건이라기보다 같은 기록을 더 쉽게 복제하려는 여러 시도 속에서 발전한 도구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종이 한 장으로 어떻게 똑같은 글씨가 만들어질까?

카본지의 원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일반적인 카본지의 한쪽 면에는 압력을 받으면 다른 표면으로 옮겨질 수 있는 색소 성분이 코팅되어 있다.

사용할 때는 원본을 작성할 종이를 위에 놓고, 그 아래에 카본지와 사본용 종이를 차례로 둔다.

그 상태에서 위쪽 종이에 펜으로 글씨를 쓰거나 타자기의 키를 누르면 압력이 카본지까지 전달된다. 눌린 부분의 색소가 아래쪽 종이에 묻으면서 위에 쓴 글자와 비슷한 모양의 사본이 만들어진다.

특히 타자기와 궁합이 좋았다.

타자기의 활자가 잉크 리본을 때려 위쪽 종이에 글자를 만드는 순간 그 충격이 아래에도 전달되기 때문이다. 종이와 카본지를 여러 겹 적절하게 배치하면 한 번의 타이핑으로 원본과 여러 장의 사본을 동시에 만들 수도 있었다.

물론 아래로 내려갈수록 압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사본을 무한정 늘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타자기의 타격 강도와 종이 두께, 카본지의 품질 등에 따라 만들 수 있는 사본의 수와 선명도가 달라졌다.

그래도 같은 문서를 처음부터 여러 번 타이핑하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었다.

카본 카피라는 표현은 왜 이메일에도 남았을까?

카본지를 사용하던 사무 환경은 오늘날 이메일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메일을 보낼 때 볼 수 있는 CC가 대표적이다.

CC는 carbon copy의 약자다.

카본지를 이용해 원본과 함께 만든 사본을 ‘카본 카피’라고 불렀고, 이 표현이 나중에는 동일한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함께 전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메일의 CC에는 실제 종이도 카본지도 없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 보내는 내용을 다른 사람도 함께 받아볼 수 있도록 한다는 개념이 남으면서 오래된 사무용어가 디지털 환경으로 이동한 것이다.

BCC 역시 여기에서 연결된다.

BCC는 blind carbon copy를 뜻한다. 이메일에서는 다른 수신자에게 주소가 표시되지 않도록 사본을 보내는 기능을 가리킨다.

카본지 시대에도 여러 장의 사본을 만들면서 각각 누구에게 전달되는지 관리해야 했다. 디지털 메일에서는 실제 복사 과정이 완전히 사라졌지만 ‘원본과 사본을 누구에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업무 개념은 계속 남았다.

이런 사례는 기록도구가 사라진 뒤에도 그 도구에서 만들어진 단어와 사용 습관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서 타자기의 키 배열이 컴퓨터 키보드에 흔적을 남긴 것처럼, 카본지는 이메일의 CC라는 짧은 두 글자 속에 흔적을 남긴 셈이다.

카본지가 없어도 복사되는 종이는 무엇일까?

식당이나 배송 업무 등에서 여러 장이 겹쳐 있는 서식에 글씨를 쓰면 아래쪽 종이에도 내용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종이 사이를 살펴봐도 검은색이나 파란색의 별도 카본지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런 문서에는 무탄소 복사지(carbonless copy paper)가 사용될 수 있다.

20세기 중반 상용화된 무탄소 복사지는 별도의 카본지를 끼우지 않아도 압력을 이용해 아래쪽 종이에 표시가 나타나도록 만든다.

종이 표면에 아주 작은 캡슐 형태로 들어 있는 물질과 다른 층의 화학 성분이 압력에 의해 반응하면서 색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위에서 펜으로 눌러 쓰면 필요한 부분의 미세한 캡슐이 깨지고, 관련 물질이 다음 종이의 코팅층과 반응하면서 글씨가 나타난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카본지를 따로 끼웠다가 빼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과거의 카본지는 코팅된 면을 잘못된 방향으로 넣으면 원하는 위치에 복사가 되지 않을 수 있었고, 손이나 주변 종이에 색소가 묻기도 했다. 무탄소 복사지는 이런 불편을 상당 부분 줄였다.

지금도 일부 신청서나 거래 관련 서식, 현장에서 사용하는 여러 장짜리 기록지에서 이런 원리를 찾아볼 수 있다.

복사기가 등장하자 문서 복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카본지의 가장 큰 특징은 원본을 만드는 순간 사본도 함께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작성이 끝난 오래된 문서를 나중에 복사하려면 카본지를 끼워 넣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크게 바꾼 것이 현대적인 복사 기술의 발전이었다.

20세기 미국의 체스터 칼슨(Chester Carlson)은 정전기와 광전도 현상을 이용한 건식 복사 기술을 개발했다. 1938년에는 훗날 제로그래피(xerography)로 발전하는 방식의 초기 복사 실험에 성공했다.

이 기술이 상업적으로 발전하면서 사무실의 문서 복사 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이제 문서를 작성하는 순간 사본의 수를 미리 결정할 필요가 줄었다. 완성된 원본을 가지고 필요할 때 추가 사본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복사기가 보급되고 이후 프린터와 디지털 문서가 널리 사용되면서 전통적인 카본지의 역할은 크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카본지가 해결하려 했던 문제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 번 만든 기록을 어떻게 쉽고 정확하게 여러 사람에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카본지는 압력을 이용했고, 복사기는 빛과 정전기 등을 이용했으며, 컴퓨터는 정보를 디지털 데이터로 복제한다. 기술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기록을 복제하려는 목적은 이어지고 있다.

마무리

카본지는 구조만 보면 놀랄 만큼 단순한 기록도구다.

두 장의 종이 사이에 색소가 코팅된 종이를 끼우고 압력을 가하면 아래쪽에도 같은 흔적이 남는다.

하지만 타자기가 중요한 사무기기였던 시대에는 이 단순한 원리가 매우 실용적이었다. 같은 편지나 문서를 처음부터 다시 작성하지 않고 한 번의 타이핑으로 사본까지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무탄소 복사지가 등장하면서 별도의 카본지를 끼우는 불편이 줄었고, 복사기가 널리 사용되면서 이미 완성된 문서도 필요할 때 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디지털 파일을 몇 번의 조작만으로 복사하고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보낼 수도 있다.

그런데 오래된 카본지는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 아직 남아 있다.

이메일을 작성할 때 무심코 누르는 CC라는 글자다.

실제 카본지는 사라졌어도 ‘사본을 함께 보낸다’는 개념과 이름은 디지털 기록 속에서 계속 사용되고 있다. 기록도구의 역사를 살펴보는 재미도 이런 부분에 있다.

물건은 사라져도 그 물건이 만들어낸 습관과 언어는 생각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FAQ

Q. 카본지에는 실제로 탄소가 들어 있었나요?

전통적인 카본지는 이름처럼 초기에는 카본 블랙 같은 탄소계 검은 색소가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품과 시대에 따라 왁스나 오일, 다양한 색소와 염료 등이 함께 사용되었기 때문에 모든 카본지를 단순히 탄소만 바른 종이라고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Q. 이메일의 CC는 정말 카본지에서 나온 표현인가요?

네. CC는 ‘carbon copy’의 약자로, 카본지를 이용해 만든 문서의 사본을 가리키던 표현에서 이어졌습니다. 이메일에서는 실제 카본지를 사용하지 않지만 같은 내용을 다른 수신자에게 함께 전달한다는 의미로 이 용어가 남아 있습니다.

Q. 무탄소 복사지는 카본지와 같은 것인가요?

목적은 비슷하지만 구조는 다릅니다. 전통적인 카본지는 별도의 색소 코팅지를 종이 사이에 끼워 압력으로 색을 옮깁니다. 무탄소 복사지는 종이에 적용된 미세 캡슐과 반응성 코팅 등을 이용해 압력이 가해진 부분에 색이 나타나도록 하는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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