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점에 가면 수많은 종류의 공책이 진열되어 있다.
줄이 그어진 노트부터 작은 수첩, 스프링 노트, 무지 노트까지 필요한 용도에 따라 고르면 된다. 가격도 특별한 제품이 아니라면 큰 부담 없이 살 수 있다.
더 흥미로운 점은 공책을 살 때 그 안에 무엇을 쓸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수업 내용을 적어도 되고 일기를 써도 된다. 업무를 정리하거나 여행 기록을 남기고 떠오른 생각을 적어둘 수도 있다.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종이를 여러 장 묶어 개인이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것은 지금은 너무 평범한 개념이다.
하지만 종이가 귀하고 책 한 권을 만드는 데 많은 노동이 필요했던 시대에는 빈 종이 여러 장을 개인적인 메모용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지금과 같은 일상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공책의 역사를 살펴보면 종이가 어떻게 책과 공식 문서의 재료에서 개인의 일상으로 들어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공책 이전에도 사람들은 개인적인 기록을 남겼다
공책이 보편화되기 전에도 사람들에게 메모할 일은 있었다.
상인은 물건의 거래를 기록해야 했고 학생과 학자는 공부한 내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개인적인 계산이나 기억해야 할 내용을 적어두는 사람도 있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왁스 태블릿(wax tablet) 같은 도구도 사용됐다.
나무판 안쪽에 밀랍을 채우고 뾰족한 도구인 스타일러스로 글자를 새기는 방식이다.
밀랍 표면을 다시 고르게 만들면 내용을 지우고 재사용할 수도 있었다.
영구적으로 보존해야 하는 책이라기보다 메모와 계산, 학습 등 다양한 임시 기록에 활용하기 좋은 특성을 가진 도구였다.
여러 개의 판을 연결해 접을 수 있도록 만든 형태도 있었다.
이 모습은 기록 매체의 역사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모든 기록을 똑같은 재료에 남기지 않았다.
오랫동안 보존할 글과 잠깐 필요한 메모는 목적이 다르다.
값비싼 기록 재료가 사용되던 시대일수록 지웠다가 다시 쓸 수 있는 도구는 실용적인 선택이 될 수 있었다.
종이가 늘어나자 빈 종이의 쓰임도 커졌다
종이가 여러 지역에서 생산되고 제지업이 성장하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졌다.
종이가 양피지를 완전히 없앤 것은 아니지만 점차 더 다양한 기록에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됐다.
책뿐 아니라 편지와 계약서, 행정문서, 상업 장부 등 종이의 사용처가 넓어졌다.
여기에는 개인이 작성하는 기록도 포함된다.
상업 활동에서는 거래 내용을 계속 기록해야 한다.
얼마를 사고팔았는지, 누구에게 돈을 받을지, 어떤 물건이 들어오고 나갔는지를 기억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여러 장의 종이를 묶어 장부 형태로 사용하면 기록을 시간 순서나 항목에 따라 축적하기 편하다.
학자 역시 비슷하다.
읽은 책의 일부를 옮겨 적고 중요한 문장을 모으거나 자신의 생각을 덧붙일 수 있다.
인쇄된 책은 이미 내용이 정해져 있지만 빈 종이는 사용자가 자신의 정보를 만들어 넣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종이의 공급이 확대될수록 이런 사용 방식도 성장할 수 있었다.
중세와 근세의 노트는 오늘날 공책과 똑같지 않았다
오래된 시대의 기록물을 현대의 공책과 완전히 같은 모습으로 상상할 필요는 없다.
크기와 제본 방식, 종이의 품질도 다양했고 사용하는 목적에 따라 형태가 달랐다.
이미 다른 용도로 사용했던 종이의 빈 부분을 활용하기도 했다.
종이가 지금보다 귀했던 환경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 기록면을 그냥 버릴 이유가 적었기 때문이다.
학자와 학생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내용을 모아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유럽에서는 읽은 책의 문장이나 격언, 지식 등을 주제별로 모아두는 기록 관행이 발전했다.
후대에는 이런 형태의 책을 커먼플레이스 북(commonplace book)이라고 부르는 전통이 널리 알려졌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개인 지식 노트에 가깝다.
책을 읽다가 중요한 문장을 적고, 다른 자료에서 얻은 내용을 같은 주제 아래 모으고, 필요할 때 다시 찾아본다.
단순히 기억하기 위한 메모가 아니라 정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분류하고 재사용하기 위한 기록이었다.
오늘날 독서노트나 아이디어 노트를 만드는 행동과 연결해 생각해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노트도 개인 기록의 좋은 사례다
역사적인 노트를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사람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다.
그가 남긴 여러 기록에는 글뿐 아니라 기계 구조와 인체, 자연현상 등에 관한 그림과 생각이 함께 들어 있다.
이 기록들이 흥미로운 이유는 완성된 책을 독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인쇄한 것이 아니라 생각과 관찰을 축적한 흔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페이지에는 글과 그림이 함께 있고 생각이 발전해가는 과정도 나타난다.
모든 페이지가 현대 출판물처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개인 노트의 중요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인쇄된 책은 보통 다른 사람이 읽을 최종 결과물을 만든다.
반면 노트는 반드시 완성된 결과물일 필요가 없다.
생각 중인 내용을 적어도 되고 잘못된 아이디어를 남겨도 된다. 나중에 다시 돌아와 내용을 추가할 수도 있다.
즉 노트는 완성된 지식을 저장하는 공간에서 생각을 만들어가는 공간으로 기록의 역할을 확장한다.
학교가 성장하면서 공책의 필요성도 커졌다
공책이 오늘날처럼 익숙한 물건이 되는 과정에서 교육의 확대는 빼놓기 어렵다.
학생은 수업을 들으면서 내용을 기록하고 글쓰기와 계산을 연습해야 한다.
학생 수가 적고 종이가 비싼 환경에서는 모든 학생이 충분한 양의 종이를 자유롭게 사용하기 어렵다.
실제로 시대와 지역에 따라 석판과 같은 반복 사용 가능한 학습도구가 이용되기도 했다.
작은 슬레이트 판에 글씨를 쓰고 지운 뒤 다시 사용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산업화와 제지 기술의 발전으로 종이 생산량이 늘어나고 가격이 낮아지면서 학생용 종이 제품도 점차 보급되기 쉬워졌다.
여러 장의 종이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 묶고 줄을 그어두면 수업 내용을 적거나 글씨를 연습하기 편하다.
공책의 장점은 내용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같은 형태의 공책이라도 수학 계산을 할 수도 있고 문장을 받아쓸 수도 있다.
한 사람의 학습 기록을 시간 순서대로 보관하기에도 좋다.
교육의 확대와 종이의 대량생산은 서로 다른 역사처럼 보이지만, 학생의 책상 위에서는 공책이라는 물건을 통해 만나게 된다.
줄이 그어진 종이는 왜 편할까?
공책을 펼쳐보면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일정한 간격의 가로줄이다.
별것 아닌 디자인처럼 보이지만 직접 백지에 여러 줄의 문장을 써보면 줄의 역할을 쉽게 알 수 있다.
기준선이 없으면 글씨가 조금씩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다.
특히 많은 내용을 빠르게 적을 때 일정한 줄은 글씨의 위치를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회계 장부처럼 숫자와 항목을 정확하게 맞춰야 하는 기록에서는 가로선과 세로선이 더욱 유용하다.
반대로 그림이나 자유로운 도식을 그릴 때는 아무 선이 없는 종이가 편할 수 있다.
수학이나 설계에서는 격자 형태의 종이가 도움이 된다.
이렇게 보면 공책의 발전은 단순히 종이를 여러 장 묶은 역사만은 아니다.
사람이 무엇을 기록하느냐에 맞춰 종이의 내부 구조까지 달라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늘날 줄노트, 모눈노트, 무지노트가 각각 존재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종이 대량생산이 공책을 평범한 물건으로 바꿨다
공책이 일상적인 소비재가 되려면 무엇보다 종이가 충분히 저렴해야 한다.
수백 년 동안 유럽 제지업에서는 헌 천에서 얻은 섬유가 중요한 원료였다.
하지만 인쇄물이 늘어나고 교육과 행정이 확대되면서 종이 수요는 계속 증가했다.
19세기에 들어 제지 기술이 산업화되고 목재를 이용한 펄프 생산이 확대되면서 종이를 훨씬 대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종이를 한 장씩 손으로 뜨는 대신 기계를 이용해 연속적으로 생산하는 기술도 발전했다.
이 변화는 종이의 사용 범위를 크게 넓혔다.
종이가 비싸다면 중요한 편지나 문서에 먼저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종이가 저렴해지면 연습장이나 메모지처럼 오래 보존하지 않을 기록에도 사용할 수 있다.
학생이 여러 페이지에 계산 연습을 하고 틀린 페이지가 생겨도 다음 장을 사용할 수 있다.
회사와 상점에서도 장부와 메모를 더 많이 만들 수 있다.
종이는 점차 귀한 기록면에서 소비 가능한 일상용품으로 변해갔다.
공책이 널리 사용될 수 있었던 물질적인 배경이다.
제본 방식의 변화도 공책을 다양하게 만들었다
종이 여러 장을 묶는 방법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로 꿰맬 수도 있고 접착제를 이용할 수도 있다.
금속 철심을 사용해 간단하게 고정하는 방식도 있으며, 근현대에는 철사나 플라스틱 고리를 이용한 스프링 형태도 널리 사용된다.
각 방식에는 사용 경험의 차이가 있다.
얇은 공책이라면 간단한 제본으로 충분할 수 있다.
오랫동안 보관할 기록이라면 튼튼한 표지와 제본이 중요하다.
책상 위에서 완전히 펼쳐 사용해야 한다면 잘 펼쳐지는 구조가 편하다.
페이지를 뜯어 사용해야 하는 메모장은 또 다른 구조가 필요하다.
공책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종이의 크기, 두께, 줄의 형태, 표지와 제본 방법을 조합한 기록도구다.
사용 목적이 다양해질수록 공책의 종류 역시 늘어날 수밖에 없다.
노트는 기억을 밖으로 꺼내놓는 도구가 됐다
공책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하나 고른다면 무엇일까?
많이 적을 수 있다는 점도 있지만, 사람의 기억을 종이 위에 남겨둘 수 있다는 점이 크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서 계속 기억하는 대신 목록으로 적어둘 수 있다.
책에서 읽은 내용을 기록하면 몇 달 뒤에도 다시 찾아볼 수 있다.
회의 내용을 적어두면 당시 어떤 이야기가 나왔는지 확인할 수 있다.
생각이 떠오를 때 메모하면 나중에 그 생각을 발전시킬 수도 있다.
기록은 단순한 저장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을 적을지 선택하고 비슷한 내용을 묶고 순서를 정하는 과정에서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그래서 노트는 오랫동안 교육과 연구, 업무와 창작에서 사용돼 왔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등장한 뒤에도 노트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공책의 확산은 필기구의 변화와 연결됐다
공책이 널리 보급되면 자연스럽게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그 많은 종이에 무엇으로 글을 썼을까?
오랫동안 사람들은 깃펜과 잉크를 비롯한 여러 도구를 사용했다.
하지만 잉크병을 따로 가지고 다니면서 펜촉에 잉크를 묻혀 쓰는 방식은 이동하면서 빠르게 메모하기에는 불편할 수 있다.
한편 흑연을 이용하는 연필은 비교적 간단하게 글을 쓰고 지울 수 있는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했다.
잉크를 펜 내부에 저장하는 만년필도 휴대하며 글을 쓰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종이가 아무리 흔해져도 편리한 필기구가 없다면 기록 경험에는 한계가 있다.
반대로 휴대하기 좋은 필기구가 있어도 쓸 종이가 충분하지 않으면 일상적인 메모 문화가 성장하기 어렵다.
종이와 공책, 필기구는 서로 영향을 주면서 개인 기록문화를 만들어갔다.
마무리
공책은 어느 날 한 사람이 갑자기 만들어낸 단순한 발명품이라기보다 종이가 점점 흔해지는 과정에서 발전한 기록도구에 가깝다.
공책 이전에도 사람들은 왁스 태블릿 같은 재사용 가능한 도구에 메모했고, 종이가 보급된 뒤에는 상업 장부와 학습 기록, 개인적인 지식 노트 등 다양한 형태의 기록을 남겼다.
제지 기술이 산업화되고 종이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빈 종이 여러 장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부담도 줄어들었다.
교육의 확대와 사무 활동의 증가 역시 공책의 사용 범위를 넓혔다.
그 결과 종이는 왕실과 교회, 행정기관과 책 제작자의 재료를 넘어 평범한 사람의 책상 위로 들어왔다.
그리고 종이가 개인의 일상으로 들어오자 함께 변화한 물건이 있었다.
바로 글씨를 쓰는 도구다.
다음 10편에서는 연필과 만년필은 어떻게 등장했고, 새로운 필기구가 사람들이 종이에 기록하는 습관을 어떻게 바꿨는지 살펴보려 한다.
FAQ
Q1. 공책은 누가 처음 발명했나요?
오늘날 공책의 기원을 특정한 한 사람의 발명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여러 형태의 개인 기록물을 사용했고, 종이 생산과 제본 기술이 발전하면서 빈 종이를 묶어 사용하는 노트와 공책이 점진적으로 보편화됐습니다.
Q2. 종이 공책 이전에는 학생들이 무엇에 글을 썼나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재료가 사용됐습니다. 고대에는 밀랍을 채운 왁스 태블릿 같은 재사용 가능한 기록판이 활용됐고, 후대에는 작은 슬레이트 판을 학습에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종이가 저렴해지면서 종이 공책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쉬워졌습니다.
Q3. 커먼플레이스 북은 일기와 같은 것인가요?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일기가 날짜에 따라 개인의 경험이나 생각을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면, 커먼플레이스 북은 책에서 읽은 문장이나 지식, 격언, 아이디어 등을 주제에 따라 모으고 정리하는 용도로 널리 활용됐습니다. 현대의 독서노트나 개인 지식노트와 비교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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