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장은 단순한 가구처럼 보인다.
위에서 아래까지 비슷한 크기의 서랍이 여러 개 있고,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각각의 수납공간이 앞으로 나온다. 옷이나 수건, 문서처럼 비교적 작은 물건을 종류별로 나누어 보관하기에 편리하다.
그런데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독특한 구조다.
커다란 상자 하나를 만들어 물건을 모두 넣는 대신 작은 상자를 여러 개 만들어 위아래로 쌓아놓았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하나의 큰 수납공간을 여러 층의 서랍으로 나누기 시작했을까?
그 이유는 단순히 물건을 많이 넣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아래쪽에 있는 물건을 꺼내기 어렵다는 상자형 수납의 불편함을 줄이고, 한정된 바닥 면적에서 더 많은 물건을 종류별로 보관하려는 필요가 서랍장의 형태에 영향을 주었다.
큰 상자는 많이 들어가지만 꺼내기가 불편했다
상자는 오래전부터 사용하기 좋은 수납도구였다.
구조가 비교적 단순하고 뚜껑을 닫으면 내부의 물건을 한곳에 모아둘 수 있다. 옷과 직물뿐 아니라 다양한 생활용품을 보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깊은 상자에는 단점도 있다.
물건을 위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으면 가장 아래에 넣어둔 물건을 꺼내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여러 벌의 옷이 들어 있는 상자에서 맨 아래의 옷이 필요하다면 위에 놓인 옷부터 들어내야 할 수 있다.
다시 넣을 때도 순서를 정리해야 한다.
물건이 적을 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보관해야 할 것이 많아질수록 불편해진다.
여기에서 수납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하나의 깊은 공간에 물건을 모두 쌓는 대신 여러 개의 얕은 공간으로 나누면 어떨까?
이렇게 하면 필요한 층만 열어서 물건을 꺼낼 수 있다.
서랍장의 기본적인 장점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서랍은 ‘움직이는 작은 상자’에 가깝다
서랍을 가구에서 완전히 빼내어 보면 작은 상자와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뚜껑 대신 가구 자체가 위쪽을 덮어주고, 서랍 전체가 앞뒤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움직임이 수납 방식을 크게 바꾼다.
일반적인 깊은 수납장에서는 안쪽에 있는 물건을 꺼내기 위해 손을 깊숙이 넣어야 할 수 있다.
서랍은 반대로 수납공간 자체를 사람 앞으로 끌어낸다.
앞선 책상 이야기에서 살펴본 것처럼 책상 서랍이 편리한 이유도 같다. 의자에서 일어나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필요한 물건을 사용자 쪽으로 당겨올 수 있다.
이 원리를 여러 층으로 쌓으면 독립된 수납공간을 많이 만들 수 있다.
첫 번째 서랍을 열지 않아도 두 번째 서랍을 열 수 있고, 맨 위의 물건을 옮기지 않아도 맨 아래 서랍에 접근할 수 있다.
큰 상자 하나를 여러 개의 작은 상자로 나누고 각각 따로 움직이게 만든 셈이다.
옆으로 넓히는 대신 위로 쌓으면 공간을 아낄 수 있었다
집 안의 바닥 면적에는 한계가 있다.
수납상자를 여러 개 옆으로 늘어놓으면 그만큼 생활할 공간이 줄어든다.
하지만 상자를 위로 쌓으면 같은 바닥 면적에서도 더 많은 수납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서랍장은 이러한 수직 공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가구다.
바닥에서 허리나 가슴 높이 정도까지 여러 개의 서랍을 배치하면 가구 하나가 차지하는 바닥 면적을 크게 늘리지 않고도 수납공간을 여러 층으로 만들 수 있다.
이 원리는 현대의 아파트에서도 그대로 사용된다.
책장은 책을 위로 쌓고, 주방의 찬장은 벽의 높은 부분을 이용한다. 옷장 역시 바닥부터 위쪽까지 공간을 사용한다.
집이 넓어지지 않아도 가구를 높게 만들면 사용할 수 있는 수납공간은 늘어난다.
서랍장은 수평으로 펼쳐놓았던 물건을 수직으로 정리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여러 층으로 나누자 물건을 분류하기도 쉬워졌다
서랍이 여러 개라는 것은 단순히 수납공간이 많다는 뜻만은 아니다.
각 서랍에 서로 다른 역할을 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옷을 예로 들면 작은 의류는 위쪽 서랍에 넣고 부피가 큰 옷은 아래쪽의 깊은 서랍에 보관할 수 있다.
문서를 보관한다면 종류에 따라 서로 다른 서랍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이렇게 공간을 나누면 필요한 물건이 있을 만한 위치를 어느 정도 기억할 수 있다.
모든 물건이 하나의 커다란 상자 안에서 뒤섞이는 것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서랍장에서도 이런 특징은 쉽게 확인된다.
서랍의 깊이가 모두 같은 제품도 있지만 위쪽에는 얕은 서랍을 두고 아래쪽으로 갈수록 깊게 만드는 가구도 있다.
작은 물건에 지나치게 깊은 공간을 사용하면 오히려 찾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결국 좋은 수납은 무조건 큰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건의 크기와 사용 빈도에 맞게 공간을 나누는 것과 관련이 있다.
서랍장이 만들어지려면 정교한 목공도 필요했다
상자를 단순히 위에 쌓는 것과 서랍장을 만드는 것은 다르다.
서랍장은 각각의 서랍이 가구 안에서 반복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너무 꽉 맞으면 당기기 어렵고, 지나치게 여유가 있으면 서랍이 흔들릴 수 있다.
특히 전통적인 목재 가구에서는 나무의 성질도 고려해야 했다.
나무는 주변의 습도 등 환경에 따라 미세하게 팽창하거나 수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랍과 몸체가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부품을 정교하게 가공하는 기술이 중요했다.
서랍 앞판과 옆판, 바닥판을 튼튼하게 연결하는 방법도 필요하다.
서랍을 잡아당길 때마다 연결 부위에 힘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가구 제작기술이 발달하면서 여러 개의 서랍을 하나의 견고한 몸체 안에 배치하는 형태도 더욱 다양해질 수 있었다.
겉으로는 단순한 직사각형 가구지만 실제로는 여러 개의 움직이는 부품이 정확하게 맞아야 하는 구조인 셈이다.
금속 레일은 서랍을 더욱 부드럽게 움직이게 했다
전통적인 서랍에 오늘날과 같은 금속 레일이 반드시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무와 나무가 맞닿거나 목재로 만든 받침과 홈을 따라 서랍이 움직이는 구조를 사용할 수 있었다.
현대에는 여기에 금속 레일과 롤러, 볼베어링 등을 이용한 장치가 널리 사용된다.
이러한 부품을 사용하면 무거운 물건이 들어 있는 서랍도 비교적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다.
서랍을 더 멀리 꺼낼 수 있도록 설계하면 안쪽에 있는 물건을 확인하기도 쉬워진다.
최근에는 서랍을 밀었을 때 마지막 부분에서 천천히 닫히도록 하는 장치도 흔하다.
세게 밀어도 충격을 줄이며 닫히도록 만든 것이다.
수납이라는 기본적인 목적은 그대로인데 ‘열고 닫는 경험’까지 가구 설계의 대상이 된 셈이다.
상자에서 출발한 단순한 구조가 반복적인 개선을 통해 정교한 움직임을 가진 가구로 발전했다.
서랍장의 윗면도 또 하나의 공간이 되었다
서랍장은 위쪽으로 수납공간을 쌓으면서도 맨 위에는 평평한 면을 남긴다.
이 부분도 자연스럽게 생활공간으로 활용된다.
작은 물건이나 장식품을 올려놓을 수 있고 침실에서는 거울을 함께 두어 화장대와 비슷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서랍장이 지나치게 높지 않은 형태로 많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이런 사용법도 영향을 준다.
사용자가 위쪽에 올려놓은 물건을 손으로 쉽게 집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더 많은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 높이를 크게 늘리면 서랍보다 문이 달린 장이나 선반 구조가 편리해질 수 있다.
아주 높은 위치에 있는 서랍은 안쪽을 내려다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구의 높이에도 사용자의 몸이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의자와 책상의 높이가 앉은 자세에 맞춰졌듯 서랍장의 높이와 서랍 위치 역시 사람이 서서 손을 뻗고 물건을 꺼내는 동작과 연결된다.
현대 가구에서도 ‘층층이 수납’은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서랍장 외에도 다양한 수납가구가 있다.
옷장 안에도 서랍이 들어가고, 침대 아래에도 서랍이 설치된다. 주방에는 여러 크기의 서랍이 있으며 책상 아래에는 이동식 서랍장을 따로 두기도 한다.
서랍은 더 이상 하나의 독립된 가구에만 사용되는 구조가 아니다.
필요한 곳에 넣을 수 있는 하나의 수납 방식이 됐다.
그 이유는 여전히 분명하다.
물건을 층별로 나누고 필요한 공간만 앞으로 꺼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작은 물건이 많을수록 이러한 방식이 유용하다.
커다란 수납장 안에 작은 물건을 모두 쌓아놓으면 찾기 어렵지만 여러 개의 서랍으로 나누면 각각의 위치를 정할 수 있다.
가구의 역사가 결국 물건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역사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서랍장은 상자를 없앤 것이 아니라 다시 배열한 가구다
서랍장이 층층이 생긴 이유를 살펴보면 새로운 가구가 언제나 완전히 새로운 발명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자는 이미 물건을 보관하는 훌륭한 도구였다.
하지만 깊은 상자에 물건을 겹쳐 넣으면 아래쪽에 있는 것을 꺼내기 불편했다.
그래서 상자를 작고 얕게 나누고 각각 독립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여러 개의 작은 수납공간을 옆이 아니라 위로 쌓아 한정된 바닥 면적을 효율적으로 사용했다.
그 결과가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서랍장의 기본적인 구조다.
오늘날 옷장과 책상, 침대와 주방가구 곳곳에 서랍이 들어가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필요한 물건을 종류별로 나누면서도 쉽게 꺼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물건을 서랍 속에 감출 필요는 없다.
자주 사용하는 책이나 그릇처럼 한눈에 보고 바로 꺼내고 싶은 물건이라면 오히려 문과 서랍이 없는 구조가 편리할 수 있다. 다음 글에서는 사람들이 왜 물건을 상자 안에 넣는 대신 벽을 따라 여러 층의 선반에 올려놓기 시작했는지를 살펴보면 수납가구가 ‘감추는 가구’와 ‘보여주는 가구’로 나뉘어 온 과정을 이어갈 수 있다.
FAQ
서랍장은 왜 서랍을 옆으로 나열하지 않고 위로 쌓았나요?
위로 쌓으면 같은 바닥 면적에서도 여러 개의 독립된 수납공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집 안의 제한된 공간을 수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큰 상자보다 여러 개의 서랍이 편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큰 상자에 물건을 겹쳐 넣으면 아래쪽 물건을 꺼내기 위해 위의 물건을 먼저 치워야 할 수 있다. 여러 서랍로 나누면 필요한 층만 열어 물건을 꺼낼 수 있고 종류별로 분류하기도 쉽다.
옛날 서랍도 지금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나요?
전통적인 목재 서랍은 현대의 금속 레일 대신 목재 받침이나 홈 등을 이용해 움직이는 구조가 많았다. 오늘날에는 금속 레일과 롤러, 볼베어링 같은 부품을 활용해 더 부드럽고 안정적으로 움직이는 서랍을 만들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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